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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는 이는 보통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재밌어서 하는 이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이들.
전자의 경우는 흔히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즐기거나 취미로 하는 경우로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그럼 후자의 경우는?
일종의 직업이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업무를 통해 돈을 벌 듯이 그들도 게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다.
흔히 광부라고도 불리는 이들.
능력에 따라 용돈벌이 수준으로 버는 이들도 있고, 웬만한 대기업 직원보다 많이 버는 이들까지 다양했다.
확실한 건 웬만한 광부들치고 이 직업을 추천하는 이가 없다는 것.
당연했다.
일정이상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벌기 위해선 상상 이상으로 많은 노가다와 운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열심히 자리를 이루어냈는데 게임이 망하면 그대로 직장을 잃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게임 뿐이니 다시 다른 게임을 찾아 나서겠지.
E스포츠가 유행하며 예전보다 게임 산업이 커졌다곤 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한 직업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여전히 RPG는 밀리는 추세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서진은 다소 특별하다 할 수 있었다.
-아니;; 킹갓제너럴님 그새 또 스펙업하셨네;;
-며칠 연속으로 유니크 아이템 먹었다던데 당연하지. 심지어 한 달 전엔 레전더리 집행검 먹었다자너.
-미친, 그걸 광부가 먹을 수 있는 거였어?
-저분 운빨충으로 유명하잖. 웬만한 유명한 게임은 다 하는 거 같은데 죄다 스펙이 좋음.
-광부가 저렇게 스펙이 좋아도 되나? 웬만한 레이드컷 딜러보다 센 거 같은데.
-사실 광부라고 하기도 애매하죠. 시리스 레이드 용병으로도 뛰고 그러는 거 같던데요? 다른 게임에서도 최종 컨텐츠까지 용병으로 뛴다 들었음.
-광부에도 천외천이 있네;;
그 힘들다는 광부 세계에서 매일 1인자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인맥이 판을 치는 게임들의 특성 탓에 성주나 공대장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순 없었지만, 광부로선 최고라 치는 레이드 용병에선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뭐, 어차피 여러 게임해야하는데 길드 관리하기는 빡세지.'
심지어 한 게임도 아닌 여러 게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해서 스펙업을 해도 운이 좋지 않으면 본전도 뽑지 못하는 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으니까.
꾸준히 안정적인 수익을 내려면 영혼을 갈아넣어야하다보니 게임 하나 붙잡기도 힘들다.
운이 좋으면 두 개까지는 커버할 수 있다쳐도, 서진처럼 세네 개의 게임을 커버할 정돈 아니었다.
-저쯤 되면 직업이 궁금함. 진짜 우리랑 같은 광부가 맞나?
-ㄴㄴ 신임. 인간이라면 저런 운은 말이 안 됨. 운영자가 교묘하게 설치한 Ai거나 신의 대리자라는 게 학계의 정설.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킹갓제너럴, 그는 신이야.
-또 지랄이네 이새끼들;;
서진의 캐릭터가 가만히 멈춰있을 뿐인데 저들이 저리 떠드는 이유였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상식적으로 그의 스펙업 속도와 광부 소득은 납득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순전히 재능과 운이라고 치부하기엔 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실제로 재능이나 운 따위가 아니기도 했다.
한서진, 그에겐 '능력'이 있었으니까.
은유적인 비유가 아닌, 정말 초자연적인 능력 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후각'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나게 태어났다.
얼마나 뛰어난지 이웃집에서 메X나 포장지를 뜯으면 방에 있던 서진이 맡고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웬만한 개보다 뛰어난 후각.
실제로 본가에서 키우던 뽀삐와 물건 찾기 놀이를 자주 했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던 뽀삐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덕분에 길을 잃어도 엄마에게서 나는 화장품 냄새로 금방 찾아내곤 했다.
이런 것만 보면 편리할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서진에겐 그야말로 저주나 다름 없는 능력이었다.
평범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으니까.
옆집 청국장 냄새가 코앞에 들이민 것처럼 다가오는데 학교생활은 어떻겠는가.
입냄새 나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는 건 늘 고역이었고, 야자시간 무렵 친구들과의 대화는 그야말로 화생방이 따로 없었다.
연애?
꿈도 못 꿨다. 호감이 가기도 전에 입냄새에 정이 떨어졌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가족에게 털어놔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저 얘가 냄새에 조금 예민한 편이구나 여길 뿐.
타인에겐 털어놀 용기도 나지 않았다.
털어놔봐야 믿을 리도 없고, 손 잡고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잠들기 전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이 빌어먹을 후각이 사라지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이 불운한 후각을 탓하며 눈물을 머금기를 수 년.
기도는 정말 이루어졌다.
신이 있던 건지, 아니면 커가면서 자연스레 퇴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각이 빠른 속도로 옅어졌다.
그걸 처음 느낀 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처음으로 옆집에서 먹는 메X나의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수업 내내 맨 뒷자리에서 선생님들의 커피 쩐내를 맡지 않아도 되었고, 화생방 체험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건 나날이 냄새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을 쯤에는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후각이 되었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일반인에 비하면 여전히 뛰어났지만, 이전에 비교하면 맹인과 몽골인 수준의 차이였다.
너무 만족스러웠다.
냄새로 길 좀 못 찾고, 물건 좀 못 찾으면 어때?
화생방에서 벗어났는데!
그렇게 평범하게 군대를 다녀오고 남들처럼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연애는 못했지만, 나름 그 전철을 밟는 중이었으니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건 대학 MT때였다. 왕게임을 한답시고 제비뽑기를 하는데 자꾸만 종이에서 달콤한 냄새와 악취가 뒤섞여났던 것이다.
간만에 맡는 강렬한 향에 곧장 화장실에 달려갔다.
그리곤 쫒기듯 집으로 도망쳤다.
뒤늦게 알게 됐는데 악취가 났던 종이는 벌칙이었고, 달콤한 향기가 났던 종이는 왕이 적힌 종이였다.
그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껴 테스트해본 결과 확신할 수 있었다.
'우연이 아니야. 나한테는 냄새로 꽝과 당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심지어 그 능력도 제법 체계적이었다.
대략 한 달간 실험을 해보며 메모장에 정리한 능력은 대강 이러했다.
1.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에서는 악취가 나며, 자신에게 좋은 것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2. 냄새의 정도에 따라 피해나 이득의 정도도 달라진다.
3.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리지 않고 나며, 사람일 경우 순간적으로 마주쳤을 때 잠시 났다가 사라진다.
4. 결과가 정해져있지 않은 것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사실 저 마지막이 제일 아쉬웠다.
저 능력 때문에 로또나 주식 같은 걸 할 수 없었으니까.
'기왕 능력을 줄 거면 저것도 주지는··· 쩝.'
양심 터진 소리를 하는 서진이었으나 영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즉석복권 같은 것도 한두 번이지, 근처 편의점을 다 털다보면 금방 한계가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는 고민했다.
이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하면서 최대한 덜 힘들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당빠 게임이지.'
그런 그가 택한 건 다름 아닌 게임이었다.
게임에서는 확률이 정해져 있었고, 능력을 활용해 제법 짭짤한 돈을 만질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재미있기도 하고.
이런 능력을 가지고 굳이 게임 따위를 하냐는 말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주식도 안 돼, 로또도 안 돼.
그렇다고 사업이나 다른 무언가에 뛰어들자니 자신도 없고 귀찮다.
그에 비해 게임은 말 그대로 놀고 먹으며 돈을 버는 것 아닌가.
'자고로 인생은 꿀 빨며 사는 거지.'
그게 서진의 인생 모토였고, 실제로 그 모토대로 살 수 있었다.
남들은 얻기 힘들다는 아이템도 비교적 손쉽게 얻었고, 덕분에 여러 게임을 하며 돈도 벌 수 있었다.
요즘 RPG가 옛날 같지 않아 떼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이치고 큰 돈을 만질 정도는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억대 빚도 대부분 처리할 수 있었으니 장남 역할 톡톡히 하고 있다 볼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자기만족도도 제법 컸다.
그도 그럴 게 그저 광부짓을 하기 위해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이 떠받들여주는데 어찌 뿌듯하지 않으랴.
레이드를 가는 길드에서도 너도나도 그를 데려가기 위해 안달이었다.
일종의 미신 덕이었다.
-아니 그보다 저분 여기 온 거임? ㄹㅇ 이번엔 템 잘 뜨겠다.
-제발 유니크 이상··· 젭알···
-비나이다, 비나이다. 광부의 신 제너럴이시여···
-오늘은 되는 날이다··· 그래야만 한다··· 나 곧 애아빠 된단 말이야.
그가 참여한 곳은 좋은 아이템이 뜬다는 미신.
행운의 부적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미신이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다 그렇다.
타로도 그렇지 않은가.
과학적으론 이상하다는 걸 알아도 주변에서 잘 맞는다고 하면 혹하는 것처럼.
서진도 소문처럼 적중률이 상당히 높았던 탓에 대형 길드에서도 웃돈을 얹어서라도 데려가려 안달이었다.
요컨대 광부신 '킹갓제너럴', 혹은 행운의 부적 '킹갓제너럴' 이런 느낌이다.
'짜식들, 누가 게임페인들 아니랄까봐 여전하네.'
채팅을 슥 훑어본 서진이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으쓱이듯 어깨가 올라갔지만, 오늘은 질린다는 듯한 감정도 섞여있었다.
-ㅋㅋㅋㅋㅋㅋ 아니 아재 접는다면서요. 오늘 뜨는 게 중요함?
-그니까 더 중요하지 ㅅㅂ. 그래도 나름 광분데 접을 땐 접더라도 유니크 하나는 떠야 떳떳하지 않갔어?
-가슴이 웅장해진다.
-저 내일 뇌종양 수술합니다. 마지막으로 레전더리 하나 먹고싶습니다.
-지랄한다. 니가 뇌종양이면 나는 폐암이다.
접기 전에도 광부를 한다는 그들이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기왕 접기 전이면 못해본 컨텐츠도 좀 해보고 하지 왜 굳이 질리도록 해온 광부짓을 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세상이 멸망해도 광부로서 죽을 이들이다.
아무리 돈 때문에 한다지만, 그래도 서진은 서비스 종료나 게임을 접을 때는 묘한 씁쓸함을 느끼며 다른 걸 했는···
'흠. 아닌가? 나도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리 생각해보니 저들의 모습도 이해가 되긴 한다.
저들 나름대로 미련을 떼기 위해 마지막 게임을 보내고 있는 것일 테니.
어찌보면 관종끼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그가 더한 악질이 아닐까?
-그 와중에 킹갓제너럴사마 마지막 날까지 꿈쩍도 안 하고 서 있는 것 봐라. 나 저분 말하는 거 본 적이 없음. 저 정도면 진짜 Ai아니었을까?
-ㄹㅇㅋㅋㄹㅃㅃ
-아니, 그는 신이라니까?
괜히 정곡을 찔려 뜨끔한 서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초창기에 채팅 한 번 쳤다가 쏟아진 수많은 질문공세에 질려 어느순간부터 과묵한 컨셉을 유지하다보니 나름 재미가 붙었던 게 사실이었던 탓이다.
그렇게 눈으로 마지막 채팅들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응?"
어딘가 이상한 채팅이 눈에 들어왔다.
레전드 오브 히어로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자, 내 돈줄이었다.
“씨발.”
어제까지는.
그래. 어제까지는 말이다.
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현재 2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게이머다.
닉네임은 KIND. 최고 기록은 HCK(히어로즈 챔피언스 코리아) 우승이었다.
한 리그의 우승자. 제법 괜찮은 커리어 아니냐고?
물론.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그렇다.
“... 좆같은 감독 새끼.”
HCK에 우승하고 나면 히어로즈 월드컵이라는 전 세계인들이 참여하는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2016년. 그때 당시에는 HCK의 위상이 거의 하늘을 뚫을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HCK에서 우승한 우리 팀의 주목도 또한 엄청났다.
다만. 내 팀 ‘SY게임즈’는 정말 끔찍한 팀이었다.
형 동생들은 정말 좋았지만, 구단주의 무책임한 발언,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투자.
스크림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솔로 랭크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적을 이뤄낼 뻔 했다.
결승. 정말 뭣도 없는 팀이 결승을 갔다.
‘아!!!! 카인드 선수! 3대 0으로 결승에! 진출합니다!!’
유력한 우승 후보 팀을 준결승에서 만나, 3대 0으로 이겼다.
팀의 기세는 엄청났고, 결승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 갑자기 AD(원거리 딜러) 포지션의 카인드 선수를 빼고, 서브 AD 유래카 선수를 넣었네요?’
‘2대 0 상황에서.. 굳이 그래야 하나요?’
해설진들조차 의야해할만한 상황.
상대는 중국의 꽤 유명한 팀이었고. 나는 그때 눈치채야만 했다.
‘승부조작’
이 씨발 프런트 새끼들이 승부조작을 하겠답시고 팀의 주축인 나를 빼고, 못하는 서브 원딜러를 꾸겨 넣었다.
그렇게. 우리 팀. ‘SY게임즈’는 패배했다.
2부도 아닌 3부 리그에서 올라온 미친 새끼들도, 이 사건을 버텨내지 못하고 대부분 은퇴했다.
물론 한 시즌 동안 더 일한 놈도 있었고, 나처럼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명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후우...”
담배 한 대를 피며, 나는 그때의 그 함성 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때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욱씬거리는 이 팔목 또한 그때도 돌아가지 않을 거다.
사건의 전말은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승부조작으로 프런트가 박살나고, 나를 제외한 선수들 또한 의심을 받게 되고.
정말 멘탈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마무리를 지은 의사의 판단.
‘아무래도... 손목 터널 증후군인 것 같습니다.’
3부에서부터 올라오기 위해 미친 듯 손목을 혹사시켰다.
단 일년간 플레이 한 솔로랭크의 횟수만 해도 3400판.
정말 밥 먹고 게임만 했다.
그 결과. 단 1년 반만에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는 병을 안고 살게 되었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게. 남은 자리란 2부 리그에서 1부 리거로 승격시키는 청부사의 자리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손목 터널 증후군이 초창기에 발견되어 치료가 수월했다는 점.
불행이라면...
‘1부 최상위권 원딜들과.. 비교되네.’
아무리 치료가 빠르게 되었다고 해도, 자그마한 통증은 남아 있었고.
그 통증이 주는 미약한 반응. 그 때문에 감각의 일부를 차단한 채 게임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나이만 먹고, 실력은 늘지 않았다.
25살이라고 하면 보통 창창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게이머의 평균 은퇴 나이는 23살에서 24살 정도.
그렇기에 나는 '늙고 병든 프로게이머'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찌어찌 2부 리그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그토록 목표했던 HCK 우승과, 히어로즈 월드컵의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다.
1부 리그 청부사.
“크.”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끝이었다.
프렌차이즈를 진행하며 2부 리그는 사라지고, 오직 1부 리그만이 남게 된다.
아카데미 리그가 있긴 했지만, 그건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 더이상 나는 ‘프로게이머’가 아니다.
눈물이 새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참아냈다. 아니, 참으려 했다.
그 뿐이었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 사이에는 절망이 깃들어 있었고, 그저. 그저 그것 뿐이었다.
절망밖에 남지 않은 나는. 포장마차로 달려가 술을 퍼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친구를 불러뒀으니, 아마 여기서 기절하더라도 집으로 잘 데려다 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고.
...
“어?”
지금.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달력을 바라보았다.
2015년. 2월 17일.
5년도 더 지난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갔다.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말라는 뜻의 무휼(無恤).
약 오백 년 전의 무림에서 사파무림의 구심이었던 살수조직, 흑혈귀문(黑血鬼門)에서 암약하던 자객의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이 두려움에 잠겼다. 상대가 누구이건 일단 그의 표적이 된 이상 이미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무휼이라는 이름에 지극히 어울리는 손속으로 인해 정파무림의 공적이 된 것은 당연지사.
문제는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점이었다. 결국 무휼이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한 귀문주가 선수를 쳤다.
말 그대로 토사구팽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무휼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객행의 와중에 무휼은 우연히 원시천존이 남긴 천선경(天仙經)과 인연이 닿았다. 무림의 기존 무학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천의무봉대법(天衣無縫大法)을 연성한 것이다.
무휼이 마침내 진면목을 드러내자 흑혈귀문은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때부터 그는 정파와 사파를 막론하고 무림 전체의 공적이 되었다.
그를 사냥하기 위해 처음으로 정파와 사파가 힘을 모았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무휼을 추격하던 모든 고수들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모든 무인들의 본거지로 찾아가서 하나씩 차례대로 박살냈다.
그가 휩쓸고 간 곳은 폐허가 되었다. 일단 그의 사냥감으로 지목된 이상 그 어떤 세력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천하의 악마라는 뜻의 천마(天魔)라는 별호가 그에게 붙여진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파와 사파 양쪽에서 설 자리가 없던 이들에게는 천마라는 이름이 선망의 대상으로 급부상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무리가 그를 우상으로 여기며 추종하기 시작했다.
줄곧 독보강호를 견지해오던 무휼은 그 가운데 몇을 선택하여 적당한 무공을 전수해 주었다. 그들은 천마의 제자로 자처하며 본격적인 조직화에 나섰다.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다. 정파와 사파의 무림인들이 거짓으로 선동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으니까.
어느새 천마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단순한 무림세력이 아니라 황제에게 대항하는 역도로 낙인찍혔다. 결국 수십만의 관군이 무림인들과 합세하여 진압에 나섰다.
관부와 무림의 연합군은 오직 한 사람만 노렸으니 천마 무휼이었다. 그 와중에 십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무휼에게는 십만대적(十萬對敵)이라는 또 다른 별호가 생겨났다.
그도 인간인지라 마침내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그렇다고 적들에게 순순히 자신의 목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스스로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천마는 죽지 않고 등선하여 천마신(天魔神)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덕분에 천마를 추종하던 이들은 지하에서 다시 규합되었다. 그들은 무휼을 천마신으로 섬기는 비밀종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천마신교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십만대산을 근거지 삼아 무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유하기에 이른다.
“역시 천마신교가 숭배한다는 천마신이 바로 나였어.”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혼잣말이다.
“내가 죽은 지 대략 오백 년쯤 지났다는 이야기인데······.”
무림쟁명록(武林爭名錄)을 계속 읽어 나가는 아이의 얼굴에는 허탈한 기색이 뚜렷해졌다.
“이렇게 되면 복수고 나발이고 다 무의미하군.”
영문을 알 수는 없으나 두 번째 인생이라는 기회가 주어졌음은 명백했다. 그러나 당장은 운신조차 쉽지 않은 형편인지라 일단은 상황 파악에 집중했다.
새로운 육체의 부친은 작은 서당을 운영하는 훈장이었다. 그의 하나뿐인 늦둥이, 야율여명(耶律黎明)이 현재 신분이다.
야율정진(耶律精進)은 노산의 후유증으로 떠나보낸 부인의 몫까지 감당하며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
촌락의 이웃들 역시 엄마 잃은 여명을 불쌍히 여기며 가족처럼 챙기고 보듬어 주었다.
천애 고아였던 전생에서는 가늠조차 하지 못했던 부모와 이웃들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전생에서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학문도 제대로 배우게 되었다. 이로 인한 부작용(?)은 상당했다.
전생에서는 오직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신념 한 가지만 붙들고 살았었다. 그런데 막상 세상의 다양한 이치를 알게 되자, 지극히 단순했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다행히 상단전 기반의 천의무봉대법을 다시 연마하자 산란하던 마음은 자연스럽게 정돈되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천의무봉대법과 글공부가 하나로 병합되었다. 이른바 학사삼매대법(學士三昧大法)이 탄생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한번 읽은 것은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글공부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냈다.
뜻밖의 부작용(?)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무공 역시 일취월장하는 중이다.
매순간 치열했던 전생과는 달리 평온해도 너무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충분한 힘까지 되찾고 나자, 이제는 새로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런 삶도 나름대로 괜찮구나. 그래, 이번에는 구태여 무림에 몸담지는 않으마. 세상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천마가 세상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그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올해 초, 지병으로 숨을 거둔 부친의 다음과 같은 유언 때문이다.
“선대의 유지에 따라 초야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매진해 왔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그저 핑계였을 뿐, 이 아비는 쟁쟁한 석학들과 겨루어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하나 명아 너는 다르다. 고조부이신 야율초재 대종사 어르신처럼 능히 태평성대를 이끌 불세출의 대재상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소자가 관부로 출사하기를 바라시는 건지요?”
“그렇다. 이 아비가 떠나거든 더 이상 막북에 있지 말고 중원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반드시 황궁대학사가 되어 난세를 평정하고 도탄에 빠진 민초들에게 여명이 되어 주거라.”
오백 년 전, 온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었던 천마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분부였다. 한편으로는 전생에서의 과오를 만회할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네, 아버님. 소자, 명실상부의 귀감이 되어 보이겠습니다.”
“일선사왕? 웃기는 소리. 화산검선이라 불리던 늙은이보다 네가 더 강하구나.”
일선사왕.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고수를 칭하는 말이었다.
일선은 정파 제일 고수이자 무림맹주인 화산검선.
그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검왕, 도왕, 독왕 그리고 창왕을 묶어 사왕이라 불렀다.
목숨을 걸고 싸운 사이라.
혈마가 아부할 이유는 없었다.
순간 창왕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 나름의 미소였다.
“정말이냐? 내가 검선보다 더 강하다고?”
피식 웃은 혈마가 자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뻐하던 그가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창이 부러지고, 팔 하나를 내주면서, 저딴 상처 하나 얻은 건가? 그래서 내가 검선보다 강한 거라고?’
창왕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주인 잃은 오른손이 부러진 창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창왕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그는 세력도 이루지 않고 오직 창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왔다.
창을 들고 있을 땐.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왕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혈마는 정말 터무니없을 만큼 강하다.
여기서 죽지 않으면, 더 강해져서 저놈을 이길 수 있을까?
하염없이 땅만 바라보는 창왕이었다.
혈마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럼 부교주를 시켜주마.”
무림맹을 무너뜨린 혈마의 혈교다.
부교주가 된다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혈마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리라.
아니지. 마교 놈들도 남았으니.
그놈들은 제외해야겠군.
아무튼, 살길이 열렸으니.
마음이 흔들릴 만도 할 텐데.
창왕은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피 섞인 침을 내뱉고 말했다.
“지랄. 거절한다. 그런 제안을 하려면 팔을 자르기 전에 했어야지.”
“그래?”
“당연하지. 너 같으면 제 팔을 자른 놈 밑으로 들어가겠냐?”
창왕의 질문에 혈마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절했겠지. 본좌의 팔이 잘렸다면, 그걸 자른 놈의 사지를 산채로 뜯어냈을 것이다.”
“그렇지? 근데 얘기를 듣고 보니까 나도 네 사지를 자르고 싶어졌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오늘 무림맹도 무너뜨렸겠다, 널 만나 나름 재미있었으니. 그냥 보내주마.”
저건 자비가 아니었다.
혈마의 엄청난 자신감.
그리고 창왕인 자신 따위는 위협도 되지 못한다는 오만함이었다.
그걸 들은 창왕이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화산검선보다 더 강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다 더 환한 웃음이었다.
혈마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
“그냥. 조금 아쉬워서.”
“무엇이 말이냐?”
혈마의 질문에도 창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숨이 멎은 창왕의 몸이 땅으로 쓰러졌다.
***
심양에는 창술 명가로 소문난 양가장이 있다.
양가창법으로 한때 무림과 관에서 크게 활약하던 때가 있었다.
최근엔 몰락해서 세가 크게 줄고, 겨우 이름만 유지하는 상태였지만.
그 운가장의 작은 단층 건물 안.
거울을 보며 한숨을 연신 내쉬는 소년이 있었다.
얼굴선이 곱고, 피부는 백옥과도 같았다.
이제 막 튀어나오기 시작한 목젖이 보이지 않았다면 여자아이라고 오해했으리라.
아직 열 한 살이지만, 장차 대단한 미남으로 성장할 듯했다.
다만, 눈 밑이 어둡고, 몸이 볼품없어 보일 정도로 마른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소년을 향해 하인이 물었다.
“왜 거울을 보시면서 그리 한숨을 쉬시는 겁니까? 제가 도련님의 반만큼만 생겨도 소원이 없을 겁니다.”
“그러냐?”
“네. 소인은 평생 도련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에휴. 그럼 뭐하겠냐? 빛 좋은 개살구인데.”
“네?”
“그냥 혼잣말한 거야. 근데 내가 거울을 보면서 한숨을 쉬든 말든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허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숙인 하인이었다.
‘착해졌나 싶다가도 이럴 땐 예전하고 똑같단 말이지.’
며칠 전.
죽다 살아난 이후로 이상하게 구는 셋째 공자였다.
깨어나자마자 혈마가 어쩌고. 화산검선이 어쩌고 하는데. 그런 별호를 가진 자들은 현 무림에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없었고.
‘처음엔 셋째 도련님의 머리가 미친 줄 알았는데.’
그때를 제외하면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의원 말로는.
“가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셋째 공자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망나니짓도 눈에 띄게 줄었고,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아 다들 안심하고 있었다.
빡!
뒤통수를 맞으며 잡념에서 깨어난 하인이었다.
“아이고 아파라. 부르셨습니까?”
“내 말 못 들었어?”
한동안 방심하지 않았었는데.
요즘 몸과 마음이 조금 편해지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딴생각을 했었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해? 너나 무시하냐?”
눈알을 부라리며 손을 드는 모습이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도련님의 말 한마디면 하인인 자기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변하긴 개뿔.’
속으로 욕한 하인이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그동안 망나니 셋째 도련님을 모시며 몸에 밴 그의 생존전략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갑자기 무릎은 왜 꿇어? 그냥 앞으로 조심하라고. 알았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알았으니까. 어서 일어나서 나가.”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필요하면 내가 부를게. 그전까지는 아무도 들이지 마.”
“네. 도련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인이 도망치듯 나갔다.
소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얼마 못 가 짜증을 잔뜩 부리기 시작했다.
“역시 안되네. 이놈의 몸은 왜 이따위야? 완전 산송장이잖아.”
소년의 정체는 창왕이었다.
며칠 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난 줄 알았다.
하지만, 금발 깨달았다.
창왕인 자신이 운가장 셋째 아들 운천휘의 몸에 들어왔다는 걸.
갑자기 11살짜리 애가 되다니.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그는 새로운 몸의 상태부터 살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어. 이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전신 혈맥이 엉망이었고, 남자임에도 몸에 음기가 가득했다.
다만, 그의 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기운들이 있었고, 그게 그의 죽음을 늦춰주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몇 년? 아니 당장 올해를 못 넘기고 죽을 것 같은데?’
틈날 때마다 창왕일 때 익힌 심법을 수련하려 했다.
너무 엉망인 몸 상태 때문일까?
며칠간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죽은 자신이 왜 이 모습인지 아직 이유는 모른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죽을 순 없는 노릇.
우선 살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불치병에 걸린 몸을 고치는 것 말고 그가 직면한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운천휘란 아이의 몸이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가끔 운천휘란 아이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듯한 기분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남의 몸에 혼만 들어가 차지한 기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면 몸 건강이 더 나빠졌다.
‘큰일이야. 큰일.’
문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저리 비켜.”
#1. 내가 살아있다
세계는 지금 게이트에서 나온 악마족의 침공으로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헌터 강국이라 자부하던 대한민국.
대한민국 역시 악마족의 침공을 막지 못하였고, 헌터들은 결국 마지막 상위 헌터들을 모아 한국을 지배하는 악마족 아몬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대를 조직했다.
나 역시 공격대에 속해 있다.
물론, 나는 공격대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하는 고작 A급 헌터다.
게이트가 생성되는 초창기였다면, A급이라는 헌터 등급이 상당히 높은 등급에 속했겠지만, 세기말인 지금은 개나 소나 S등급 헌터였다.
그런 내가 이 공격대에 속한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일반적인 헌터가 아닌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는 기간트 마스터였다.
10초짜리 조루 기간트 마스터.
“저 병신은 왜 또 데리고 온거지?”
“냅둬. 그래도 노력 하나는 열심히 했잖아. 재능이 없어서 그렇지.”
“하긴, 마나가 부족해서 기간트랑 계약하고도 10초를 소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방 정도는 고기 방패가 되어줄 수 있겠네.”
“큭큭큭. 그 용도로 데려 온 건데, 본인은 모르고 있을걸.”
저들은 설마 내가 이 큰 소리를 못듣는 귀머거리로 알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고기 방패 신세인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나도 눈치가 있는데 설마 그런 공격대의 분위기를 몰랐을까. 하지만, 알면서도 모른체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헌터와는 다르게 기간트라는 이족 보행 기갑 병기를 소환하는 기간트 마스터.
기간트 마스터는 일반적인 헌터보다 월등한 신체 능력과 강한 능력을 보유한 선택받은 헌터였다.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 말하는 기간트와의 계약.
역대로 그 확률을 뚫고 기간트와 계약한 기간트 마스터들을 살펴보면 천재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다.
나만 빼고.
나는 약간 편법으로 기간트와 계약을 했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능이 바닥을 기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능의 부족은 마나의 성장 역시 더디다는 것과도 같았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스킬이나 기간트를 움직이는 동력원에 사용되는 마나. 기간트와 계약을 하는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이 마나에 대한 재능이 높았기에 기간트를 움직이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재능이 떨어졌기에 마나의 절대량이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 결과 내가 기간트를 소환하여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초 내외.
그것도 기간트를 격하게 움직이면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말인 조루 기간트 마스터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시끄럽다. 이왕 공격대에 속한 같은 동료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은 하지 않도록.”
한국의 헌터 랭킹 1위 철혈검제 한우진.
그가 동료를 욕하는 것이 듣기 거북했던지 시끄럽게 떠드는 두명의 헌터를 나무랐다.
한우진의 말은 무서웠는지 두명의 헌터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내가 노려볼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는 조용히 그들을 노려보는 나에게도 다가와 말했다.
“상현이 너도 너무 신경쓰지 마라. 다들 긴장해서 그런 것이니까.”
그건 착각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우진은 눈치가 없는 부류였다.
원래 부터 그런 스타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저렇게 눈치 없게 나 같은 허접한 헌터를 위로하고자 주력 전력인 S급 헌터를 나무라다니.
“난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고 저리 가지?”
“뭘 그리 부끄러워 하고 그러냐. 친구끼리는 괜찮다.”
하아··· 뭐가 괜찮다는건지.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 때문에 내가 더 아싸가 되는 건 생각도 안하는 거냐.
내가 괴롭힘 당하는 이유중의 일정 부분의 지분을 차지하는 그였지만, 그가 호의로 내게 이러는 것을 알기에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물론 가장 주된 이유는 내 능력이 허접한 탓이지만···.
최초로 게이트가 발견되고 나서 50년.
새롭게 자신들의 능력을 각성하는 헌터들이 하나둘 씩 생겨나고, 사회가 게이트와 함께하는 삶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에 나는 E급 능력을 각성한 하급 헌터가 되었다.
이후 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였지만, 내 재능은 그야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하지만 특성 하나만은 남들보다 특별했다.
[특성 : 뽑기 상점 이용자(EX)]
정식 명칭은 가이아 상점이지만 시스템조차 뽑기 상점이라 부르는 그 곳.
그 상점을 이용하는 이용자에게만 주어지는 EX등급 특성이 내가 각성한 특성이다.
남들처럼 특성을 각성했다고 해서 한단계 등급이 상승한 것처럼 강해지진 않았다.
다만, 강해지기 위한 토대가 만들어진 것뿐.
강해지기 위해서 랜덤 뽑기를 뽑아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런 행운은 나에게는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저놈의 독기는 인정해야지. 크큭.”
“그건 맞다. 그렇게 재능이 없었다면, 진작에 나가 뒈졌어도 몇 번을 뒈졌어야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는 거 보면 독하긴 하지.”
한우진이 자리를 뜨자 내 앞쪽에 앉아서 쉬고 있던 두 S급 헌터는 다시 또 입을 열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둘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생각도 없는지, 내 귀에 다 들리도록 크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중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슬슬 시작해야 할 때 아닌가?”
“그러게. 이렇게 지쳐서 기간트 소환하기도 힘들 때가 가장 타이밍이 좋을 때인데···.”
대체 무엇을 시작한다고 하는 걸까.
의문이 든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려 하였지만, 묻지 않아도 알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크악···.”
“너 대체 뭐야 왜 나를?”
“크크크. 이 새끼야 죽어.”
“뭐지? 누가 공격을?”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공격대장인 한우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누군가의 암습을 받아 쓰러지는 모습이 내 눈에 비쳐졌다.
등에서부터 가슴을 관통한 검 한자루.
그 검의 형태는 처음 보는 것이 아닌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헌터 랭킹 2위.
한우진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그.
평소에 3개의 검을 차고 다닌다고 하여 삼검혈호라고 불리었던 이건호의 검 중 하나가 한우진의 등을 관통해 있었다.
“이건호가 왜 한우진을···.”
“그거야, 우리가 배신자니까 그렇지.”
나의 혼잣말에 누군가가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여태까지 나를 비웃었던 헌터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 것이었다.
“한상수, 대체 왜?”
“우리는 처음부터 너희들과 같은 편이 아니었어. 이 병신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우린 이블리스라는 거지.”
한상수는 자신을 이블리스라고 말하며 검을 꺼내 질질 끌고 다가왔다.
가만히 있으면 그 검이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관통!”
조용히 스킬을 말하고는 리볼버 권총을 발사했다.
탕! 하는 발사음이 들려왔지만, 들려와야 할 비명 소리는 없었다.
“읏차! 병신 새끼가 반항하기는. 겨우 그딴 허접한 관통 스킬 하나 가지고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가 쏘아낸 탄환은 한상수의 칼질 한번에 처음 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간트를 소환할 시간을 벌기 위한 시간 끌기용이었을뿐.
“에르메스.”
기간트 에르메스를 소환하자 내 뒤에 기간트가 소환되면서 내 몸이 기간트 안으로 전이됐다.
“아, 귀찮게 됐네.”
“뭘 그래? 어차피 10초짜린데.”
“그렇기는 하지.”
그들의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10초 남짓.
탑승만 했을 뿐인데도, 마나가 쭉쭉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내 흙수저 재능이 진저리 날 정도로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한우진까지 당한 상태라면, 공격대가 아몬에게 가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공격대의 임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
그렇다면, 내 모든 마나를 쥐어짜내 너희 둘이라도 저승길 동반자로 삼아주마.
“어? 저놈이 다가온다.”
나는 에르메스의 등에 메어져 있는 강철 대검을 들고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횡으로 휘둘렀다.
비록 재능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전투를 벌인 것만 해도 수천번이 넘었다.
갖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익혀낸 나의 칼질이 그들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방어하기 위해 배리어를 펼치는 것을 보았지만, 전력을 다한 나의 칼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록 그 한번의 휘두름으로 나의 마나는 절반 이상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헛된 낭비는 아니었다.
“쯧쯧. 겨우 이런 놈한테 당하다니.”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내 몸이 엎어졌다.
아니 에르메스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곧이어 에르메스의 소환이 해제되고, 나는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땅에 나타났다.
“이건호···.”
한우진을 암습한 장본인이 내 곁에 와 있었다.
“유상현. 너 같은 놈이 그래도 기간트 마스터라고 헌터 두명 정도는 처리했네.”
“마나만 충분했어도 네놈 역시 같은 꼴이었을거다.”
“물론, 그랬겠지. 나는 너처럼 기간트 마스터가 아니니까, 당연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겠지. 마나 조루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큭큭큭.”
그의 비웃음에도 나는 아무런 노여움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안타깝고, 절망스러웠을뿐.
어차피 내 죽음은 기정 사실.
그래도 궁금한 점은 해결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건호가 완전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왜 악마족의 개가 된 것이냐? 너는 그래도 한우진과 함께 우리들의 지도자였거늘.”
“그래봤자, 기간트 마스터가 아닌 그냥 일개 헌터일 뿐이지.”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이유? 나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너 같은 병신도 기간트 마스터라고 대접받는 세상에서 기간트 마스터가 아닌 일개 헌터라는 것은 패배자나 다름 없다는 말이지.”
“대접이라······ 그래 받았지. 병신 대접. 기간트와 계약했다고 해서 조금 더 과한 병신 대접을 받았지. 겨우 이런 것이 부러웠던 것이냐.”
“물론, 그건 아니지. 난 그냥 기간트와 계약한 그 자체가 부러웠던 거야. 네놈의 기간트도 계약자를 잘못 만났을 뿐, 나를 만났다면 이렇게 조루 기간트 대접을 받으면서 일개 헌터인 내 공격에 허무하게 소환이 해제되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악마들이 자신들을 섬기면 기간트라도 하사해 준다드냐?”
“아니지. 그런 단순한 일은 아니란다. 너희야 모르니까 한국만 수복하면 무언가 바뀌겠거니 생각을 한 것일뿐. 진실을 아는 나에게는 이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지.”
“진실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뭐,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다른 놈들도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너도 가라.”
“잠······.”
좀 더 이유를 듣고 싶었지만, 이건호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나보다.
그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지면서 나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아! 이것이 나의 죽음인가···.
내 눈에 보일리 없는 목 아래의 몸이 보였다.
내 목이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긴 현상인 듯 했다.
나에게 재능만 조금 더 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텐데······
후회만이 가득한 나의 생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나를 놀리는 재미로 살아왔던 가증스런 토끼새끼.
엘비스 그 놈을 저주한다.
그렇게 나는 목이 잘려 죽었다.
내 목에서 흐르는 피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적셨고,
[회귀의 돌 사용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시간을 되돌립니다.]
내 머리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씨발 뭐지?”
목이 잘려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있다.
준영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따라서 훗날 전쟁터에서 활을 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준영은 할 수 있을 때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서 말 위에서 활 쏘는 법에 대해 제대로 찾아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뭐든 배워둬서 나쁜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활이란 게 남이 쏠 땐 쉬워보였는데 엄청 힘들네. 거기에 말 위에서 하니까 제대로 당겨지지도 않는 거 같고.'
"히히잉!"
활에 집중하느냐고 기마에 신경을 안 쓰자, 타고 있던 말이 귀신처럼 알고 투레질을 하였다.
과연 명마라고 할 만 했지만, 은밀성을 중시해야 하는 준영에게는 오히려 문제였다.
"알겠다 알겠어! 에라이 대충 쏘면 대충 맞겠지!"
준영은 빠르게 외치고는 그대로 활시위를 당긴 후 대충 놓았다.
준영의 괴력에 의해 당겨진 화살은 말 그대로 쏜살처럼 날아갔다.
전혀 정확한 조준은 아니었지만, 운이 좋았던 걸까.
날아간 화살은 준영이 겨눈 쪽에 있던 사람 한 명을 관통했다.
"커억!"
"공격이다!"
"뒤쪽에도 적이다!"
적들이 당황해 외치는 것과 동시에, 준영의 신호를 받고 부하들이 후속으로 화살들을 쏘아냈다.
결과적으로 고작 30명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쏜 화살이었지만, 그 화살들은 준비되지 않은 농민병들을 꿰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적?! 뒤쪽에서?!"
"도, 도망쳐!"
"바보 자식! 도망치는 자는 참형이다!"
"끄억!"
적들의 장수로 보이는 자가 도신이 넓은 칼을 휘두르며 도망치려던 병사를 즉각처형했다.
'애초에 도망칠 곳도 없지만.'
현재 준영이 나타난 곳은 적의 후면, 즉 퇴로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준영이 이끄는 30여명의 기병들은 전면에서 적을 막던 보병들의 뒤를 기습한 것이다.
"적은 적다! 혼란에 빠지지 마라!"
'병사의 질에 비해서 장수의 통솔력은 꽤 훌륭하군.'
준영이 그렇게 파악하는 중에, 한 명이 준영에게 물어왔다.
"어떻게 할까요?"
그 남자는 발리. 준영의 부장이었다.
"후방에 혼란을 준다는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이대로 물러나도 상관 없습니다만."
"사람이 매우 음습하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알면서 말이네."
".... 송구스럽습니다."
"자, 모두들!"
준영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30명의 부하들이 있었다.
출신도, 피부색도 심지어 종교도 다 다른 그들은 준영을 따라 말을 타고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준영의 부대원이자, 같은 군에서도 두려움을 받는 '흰색 기마대'였다.
"돌격한다!"
"예!"
그대로 준영은 서툰 활은 활통에 집어넣고, 칼을 꺼내들었다.
"이랴!"
말에 박차를 가하고, 준영은 그대로 갈팡질팡하면서도 자신들을 향해 창을 겨누는 적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우지끈!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처럼 대열이 우루루 무너졌다.
"무, 무슨!"
"저게 진정 사람이란 말이냐!"
보병들 틈에 있던 십장(什長) 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창을 들어올린 보병은 마치 벽과 같은 장애물이 되어 말의 돌진을 막을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준영이 큰 칼을 들고 휘두르자 바로 그 여파만으로 창을 든 병사들은 넘어지고, 창은 잘려나가며 대열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긁어모은 민병대 수준의 병사의 급조한 방벽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방벽이다.
그것을 그저 단 한 기의 기병이 전부 해체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존재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 비상식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이 준영에게 있었다.
"모두 죽여라!"
준영이 칼을 사방으로 흩뿌리듯 휘두르며 외치자, 뒤를 따르던 부하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와아아!"
대열이 무너져내린 병사들 틈으로 준영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습격했다.
순식간에 창과 칼이 번쩍이고 사람의 비명과 피보라가 날렸다.
그것은 흡사 늑대떼가 양들을 습격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양떼는 죽기 직전의 힘을 짜내서 늑대에게 발길질이라도 몇 번 하지, 이것은 완전 학살이나 다름 없었다.
준영의 놀라운 힘을 본 적병들은 그 순간 전의를 잃었고, 그런 그들은 그저 표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에 반해 준영의 부하들은 모두 진영의 용력을 보고 용기백배하여 평소보다도 더 매섭게 병장기를 휘둘렀다.
이것이 강력한 용장을 지닌 부대의 장점이었다.
"후, 후퇴하라!"
"후퇴할 곳이 있을 리가."
결국 적의 대장은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때를 놓쳐도 한참 놓쳤다.
아니, 애초에 준영이 그들을 먹이로 삼은 시점에서 후퇴의 가능성은 없었다.
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대로 말을 몰아 소리를 지른 자에게 나아갔다.
말은 명마답게 빠르게 돌진했고, 준영은 그대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뒤는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껏 준영의 괴력에 버틴 상대는 없었고, 이번 적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가 땅에 덜어지는 광경은 딱히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었다.
"와아아!"
"섬멸하라!"
그 기세를 타자, 부하들은 그대로 준영을 따라 순식간에 적들을 섬멸했다.
오랫동안 들판에는 비린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준영은 자신이 사냥한 적장의 목을 그어쥐고 뚜벅뚜벅 걸어나섰다.
"왔는가. 타르칸."
"과연 타르칸이야!"
뚜벅 걸어나오는 준영의 모습에 모두가 그를 주목하며, 그의 군공을 칭찬했다.
하지만 준영은 그런 그들에게 답변하지 않고, 자신의 주군의 앞까지 걸어나온 후 그대로 주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적의 수급을 베어왔습니다, 각하. 명 완수했나이다."
"잘했다."
그렇게 대답하자 준영은 자기도 모르게 움츠려들뻔 했다.
준영의 주군이 말에 담은 위세는 과연 대단했다.
이 지역, 아니, 세계 제일의 장사이자 최강의 무장이라고 자부하는 준영조차도 숨을 고르게 될 정도였다.
"이것으로 이제 토크타미쉬의 제대로 된 부하들은 사라졌다고 해야겠군."
"축하드립니다 울루그벡!"
"경하드립니다 각하!"
그렇게 준영이 무릎을 꿇은 앞에서 남자는 일어섰다.
그 남자의 이름은 티무르.
역사에 관심만 있을 뿐 평범한 회사원인 준영조차 이름은 아는 걸물이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역사를 바꾼 사람 중 하나다. 영웅호걸이 아닐 리가 없지.'
"타르칸. 듣자하니 그대는 이번 전투에서 단칼에 적의 수장, 후수인 수즈달(Husuin Suzdal)을 베었다지?"
"예."
"악명높은 놈이었는데 말이야."
"과대평가당한, 도적놈일 뿐이었습니다."
"하하하!"
티무르는 호탕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모스크바의 악몽이라고 불렸던 놈조차 그대에겐 그저 도적일 뿐이었나! 정말 유쾌하군!"
준영은 자신의 주군, 티무르의 위세 높은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지는 것을 기다렸다.
"타르칸. 정말 잘해주었다. 큰 상을 내리마."
"예."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아직 나는 잊지 않았다."
그 말이 들리자 준영은 가슴속에 넣어둔 물건의 무게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동시에 그 무게 따위는 무시할 정도로 힘이 솟아오르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때가 되면, 반드시 자네의 정당한 왕위를 되찾아주겠다. 코레의 정당한 국왕, 왕 타르칸이여."
"예!"
준영은 고개를 다시 숙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인적이 드문곳에서 가슴에 넣어둔 것을 꺼냈다.
그것은 금으로 된 인장이었다.
"그래.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